영국 하원 문화·미디어·스포츠위원회(CMS)가 넷플릭스, 아마존 프라임, 디즈니+, 애플TV+ 등 글로벌 스트리밍 플랫폼에 대해 영국 내 구독 수익(subscriber revenue)의 5%를 ‘문화기금(Cultural Fund)’으로 납부하도록 권고하면서 찬반 논란이 뜨겁다.
영국 의회는, 영국 내 프리미엄 드라마 제작 건수와 투자액이 감소하는 등 위기가 왔으므로, 자국 콘텐츠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해당 기금을 걷어 영국 드라마 제작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최근 위원회 보고서를 통해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Adolescence〉 같은 드라마는 영국의 정체성과 사회 담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이런 콘텐츠들이 자금난으로 위기에 처해 있다”며 “이제는 글로벌 플랫폼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당 보고서(British film and high-end television)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영국 내 고급 텔레비전 콘텐츠 제작 편수는 전년 대비 27% 감소했으며, 관련 투자액도 25% 하락했다. CMS는 공영방송사들이 제작비 상승과 라이선스 수수료 감소로 고급 드라마 제작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해외 스트리머들의 제작비 상승이 공영방송을 압박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BBC, ITV 등은 “이제는 고유한 드라마를 제작할 여력이 없다”는 위기의식이 높아지고 있다.

CMS 위원장인 캐롤라인 디너리지 의원은 “영국에서 제작되는 대형 블록버스터는 세계적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이면에서는 독립 제작사들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며 “문화기금은 영국 창작 생태계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균형 장치”라고 주장다. 위원회는 스트리밍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을 경우, 정부가 법제화를 통해 의무 부과할 것을 권고했다. 문화기금은 영국영화협회(BFI) 등이 관리하며, 영국 시청자를 위한 콘텐츠 제작에 사용될 방침이다.

이에 대해 넷플릭스를 비롯한 글로벌 OTT 기업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넷플릭스는 성명을 통해 “영국은 북미 외 최대 제작 허브로, 이미 수십억 파운드를 투자하고 있다”며 “부담금은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결과적으로 이용자 요금 인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밝혔다. 또 “기존 BBC 수신료를 내고 있는 이용자들에게 추가로 과세하는 것은 이중 부담이며, 성공한 플랫폼에 대한 벌금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Britishness’의 기준이 모호하고, 기금의 운용 주체나 투명성도 불확실하다는 점도 문제 삼았다.
업계 단체인 COBA(상업방송 및 주문형서비스협회)도 “부담금은 오히려 공동제작 예산을 줄이고 일자리와 산업 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글로벌 제작사 바니제이(Banijay UK)의 회장 패트릭 홀랜드는 “피키 블라인더스(Peaky Blinders)나 'SAS Rogue Heroes', HBO와 넷플릭스가 참여한 'Half Man' 같은 드라마는 영국의 공영방송만으로는 제작이 불가능했으며, 민간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밝혔다. 그는 차라리 문화세보다 제작비에 대한 세액 공제를 확대하는 것이 중장기적으로 효과적일 것이라 제안했다.
NBC유니버설 인터내셔널의 부사장 Gidon Freeman은 “영국은 프랑스나 이탈리아처럼 정부 개입이 강한 시장이 아니며, 그런 개입 전통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번 논의는 유럽의 다른 나라의 기류와도 맞물린다. CMS는 “프랑스, 독일 등 유럽 17개국이 유사한 스트리밍 부담금을 이미 시행하고 있다”며, 영국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BBC 전임 임원 피터 핀참은 “이번 제안은 일종의 관세(tariff)이며 보호무역주의적 접근”이라고 비판한다.
CMS 보고서는 이 외에도 독립 영화에 대한 세제 혜택을 확대하고, 영화관 입장권 부가세(VAT) 인하, AI 학습에 있어 창작자의 권리 보호, 프리랜서 지원책(기본소득 또는 최저임금 도입 등)을 함께 제안하면서 영국 콘텐츠 산업 전반의 구조적 개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글로벌 OTT 시대, 영국의 ‘문화세’ 논쟁은 단순한 재정적 부과 이상이다. 국가의 콘텐츠 주권과 자생적 제작 생태계 유지라는 가치 문제를 둘러싼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역시 OTT 글로벌 플랫폼 의존도가 커지고 있는 만큼, 이번 사례는 국내 콘텐츠 산업과 정책 입안에 여러 함의를 남기고 있다.
한국 방송산업 역시 유사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드라마 제작비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고, 1편당 30억 원 이상을 투자해야 하는 고비용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나 제작비 상승을 감당할 수 있는 방송사나 중소 제작사는 많지 않다. 이로 인해 고품격 드라마는 늘어났지만, 전체적인 한국 드라마의 수는 줄어 들고 있다.
또한, 글로벌 스트리밍 플랫폼에 대한 의존도 역시 빠르게 높아지고 있다. 넷플릭스는 한국 콘텐츠에 연간 수천억 원을 투자하며 <오징어 게임>, <더 글로리>, <폭싹 속았수다>, <악연> 같은 히트작을 탄생시켰지만, 이는 일면 한국 콘텐츠의 글로벌 확산을 이끈 성과인 동시에, 플랫폼 종속 구조가 고착화되는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
국내 제작사가 글로벌 OTT 플랫폼의 편성과 투자에 점차 의존하게 될 경우, 콘텐츠의 기획 주도권과 수익 배분 구조는 외부로 이탈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구조는 장기적으로 국내 제작 생태계의 자율성과 지속가능성을 위협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도 영국과 유럽 주요국처럼 콘텐츠 산업 보호를 위한 정책 논의를 본격화할 필요가 있다. 첫째, 국내 OTT 및 방송사에 대한 제작비 세액공제와 정책금융 지원을 확대해 자국 내 제작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둘째, 콘텐츠 산업의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율적 또는 법정 문화기금 제도의 도입 여부를 검토할 시점이다. 셋째, 해당 기금은 콘텐츠 제작 지원을 넘어 인력 양성, 기술 인프라 확충, 프리랜서 복지 등까지 포괄할 수 있도록 통합적인 산업정책 체계로 설계돼야 한다.
콘텐츠는 단순한 산업을 넘어 국가의 정체성과 문화, 경제를 함께 지탱하는 핵심 자산이다. 영국의 문화기금 논의는 일종의 세금 논쟁을 넘어, 자국 콘텐츠 주권을 지키기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국 역시 지금이야말로 콘텐츠 산업의 자립 기반을 재설계하고, 미래를 대비한 장기적 구조 개편에 나서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