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영화만으론 생존할 수 없다.” 100년 넘게 미국 남부와 중서부에서 극장을 운영해온 가족기업 '비앤비 씨어터(B&B Theatres)'의 대표 밥 배그비(Bob Bagby)의 말은 오늘날 전 세계 극장 산업이 직면한 현실을 함축한다. 팬데믹 이후 관객의 발걸음이 끊긴 극장가는 이제 ‘단순 상영관’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음을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미국: 영화관에서 ‘복합 문화 공간’으로... 변해야 한다.
B&B Theatres는 위기를 기회로 삼고 있는 중이다. 팬데믹으로 스튜디오의 신작 공급이 줄고 관객의 극장 방문이 사라지자, B&B는 영화 상영 외에도 볼링장, 피클볼 코트, 아케이드 게임, 바 등 다양한 문화 활동을 즐길 수 있는 ‘멀티플렉스 문화 공간’으로 방향을 틀었다.

B&B는 현재 4개의 복합 시설을 운영 중이며 올해 안에 4곳을 추가 오픈할 계획이다. 영화 관람 여부와 관계없이 고객이 머무르며 소비하도록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B&B의 이런 시도는 미국 극장 산업 전반이 직면한 위기 속에서 나온 것이다. 팬데믹 이후 미국 내 상영관은 5,691개가 사라졌고, 2024년 북미 박스오피스 매출은 팬데믹 이전보다 23.5% 줄어든 87억 달러에 머물렀다. 대형 체인인 리갈 시네마(Regal Cinemas)와 알라모 드래프트하우스(Alamo Drafthouse) 도 팬데믹을 견디지 못하고 줄줄이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지나 해 2024년 6월, 알라모 드래프트하우스 텍사스 북부지역의 5개 지점은 갑작스럽게 폐쇄되기도 했다.
극장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관객을 다시 끌어모으려 노력하고 있다. VIP 멤버십 확대, 좌석 개선, 조조·심야 할인, 다양한 간식 판매 등이 대표적이다. 일부는 블록버스터에 더 높은 가격을 책정하거나, 드라마·코미디 장르엔 할인 요금을 적용하는 변동가격제를 도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익성 악화 우려로 널리 퍼지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 극장 업계는 정부와 스튜디오에 홀드백 기간(WINDOW) 재조정을 요구하고 있다. 팬데믹 이후 영화는 극장 개봉 후 17일 만에 OTT로 전환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극장 업계는 이와 같은 홀드백 축소가 극장의 수익을 갉아먹는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AMC CEO 아담 애런은 최소 60일 창구 회복을 요구하며 “할리우드가 돈을 버릴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이제 할리우드는 단축된 홀드백에 익숙해졌지만, 극장 업계는 “실패한 실험”이라며 반발하고 있는가 하면, 일부 스튜디오들도 극장 상영의 중요성을 재인식하면서 일부분은 동의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 관객 경험의 질을 높인 IMAX, 4DX, 돌비시네마 등 프리미엄 상영관은 여전히 관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IMAX CEO는 “진짜 프리미엄은 단순히 화면을 키운 게 아니라 콘텐츠를 최적화하는 것”이라며, 차별화된 상영 경험이 극장의 미래라고 강조한다. IMAX처럼 고가의 프리미엄 티켓이 관객 수 감소를 어느 정도는 상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극장 관객의 감소는 극장 사업자들의 자금난을 가속 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업계 위기를 중점적으로 보도하는 언론 때문에 벤쳐 캐피털과 금융 기관은 극장에 적극적으로 투자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이에 극장주들이 회원으로 있는 시네마 유나이티드(Cinema United)는 극장 산업의 가능성을 강조하면서 자본 유치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시네마 유나이티드 대표, 마이클 오리어리는 “영화의 초기 공개 창구를 극장이 담당해야 관객에게 혼란을 주지 않고, 산업 전체에 도움이 된다”면서, "내년, 후년을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20~30년 후를 상상해야 할 때'라고 주장한다.
1. 영화관은 여전히 문화 소비의 핵심 공간이다.
- OTT와 달리 극장은 영관 콘텐츠에 대한 '공동 경험'을 제공
- 큰 스크린, 고음질 사운드, IMAX, 4DX 등 극장의 프리미엄은 관객의 몰입 욕구를 상승
2. 극장은 스튜디오와 윈윈하는 상업 생태계의 중요한 축이다.
- 극장 개봉작이 만들어내는 ‘화제성’, ‘흥행 서사’는 이후 스트리밍, VOD, 상품화 등으로 수익 확장 가능한 만큼 극장 홀드백을 통한 생태계 조성이 전체 산업을 건전화시킬 수 있음
3. 극장은 재창조될 수 있는 공간이며, 20~30년 뒤를 바라봐야 할 시점이다.
한국: 해외 진출한 CGV만 흑자… 국내 중심 롯데·메가박스는 적자
한국 역시 상황은 녹록지 않다. 2024년 한국 3대 멀티플렉스의 실적은 양극화를 보여준다.
CGV는 해외 사업 성장과 특별관 확산, 신사업 편입 덕에 매출 1조9천579억 원, 영업이익 759억 원을 기록하며 유일하게 흑자를 달성했다(연결 재무제표 기준). 특히 베트남(영업이익 263억 원), 인도네시아(영업이익 127억 원), 튀르키예(영업이익 37억 원) 등지에서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했고, 4DX와 ScreenX 등의 기술형 특별관 매출은 전년 대비 70% 증가했다. 또한 CJ올리브네트웍스 편입으로 7,762억 원의 추가 매출을 반영했다.
반면, 롯데시네마는 영업손실 84억 원, 메가박스는 영업손실 179억 원을 기록했다. 이들은 모두 국내 시장 의존도가 높고, 해외 수익원이 없어 관객 감소와 고정비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으면서 CGV와 대조를 이루었다.
이에 따라 롯데시네마와 메가박스는 극장 내 구독형 멤버십 도입, 공간 비즈니스 다각화(대관, e스포츠, 컨퍼런스), 가성비 F&B 패키지, 특별관 할인 확대, OTT와의 협업 콘텐츠 선공개 등 다양한 생존 전략을 준비 중이다.

극장의 미래: 변화 없이 생존 없다..변즉궁(窮則變)-통즉변(變則通)-통즉구(通則久) 전략 마련할 때
미국과 한국 모두 극장이 더 이상 ‘영화만 틀어주는 공간’이 아님을 업계 종사자들은 모두가 공감하고 있다. 팬데믹은 바이러스라는 외부 변수로 발생한 위기였다면, 지금은 산업의 변화를 준비하지 못하고 기존의 모델의 한계를 드러낸 위기이다. 영화는 여전히 강력한 콘텐츠이지만, 관객은 비싼 영화 요금과 콘텐츠 부재로 극장을 외면하고 있다. 게다가 어려워진 살림으로 서비스는 점점 더 부실해 져서 극장을 찾지 않는 악순환의 반복이다.
극장 산업이 살아남기 위해선, 기술적·공간적 혁신은 물론, OTT와의 협력, 소비자와의 새로운 관계 정립이 필요하다. 변화는 어렵고, 자본은 부족하며, 관객의 눈높이는 높아졌다. 하지만 선택지는 하나다. 변해야 산다.
궁하면 변해야 한다(窮則變). 변해서 통 할 수 만 있다면(變則通), 극장 산업의 새로운 전개가 (通則久)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