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와 공영방송의 갈등 ① – 정치가 공영미디어를 위협할 때
하원 통과한 ‘공영방송 예산 삭감안’…트럼프의 강경 드라이브 본격화
지난 6월 12일, 미국 하원은 공공방송공사(CPB)에 배정된 11억 달러 규모의 예산을 삭감하는 법안을 찬성 214표, 반대 212표로 가까스로 통과시켰다. 공화당이 주도한 이번 조치는 단순한 예산 절감이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이 이끄는 ‘공영방송 해체 전략’의 일환으로 평가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PBS, NPR 등 대표 공영미디어들이 자신과 보수 진영에 편향돼 있다며, “좌파 선전 도구에 국민 세금을 낭비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PBS, 즉각 법적 대응…“대통령은 언론을 심판할 수 없다”
공영방송에 지원하던 연방 자금 중단에 대해 PBS는 즉각적으로 반발했다. PBS는 트럼프의 행정명령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예산 권한을 침범했다고 주장하며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PBS는 “대통령이 특정 언론의 보도 내용을 이유로 예산을 중단하는 것은 명백한 위헌”이라며, 이번 조치가 언론 자유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임을 강조했다. 이번 소송에는 미네소타의 Lakeland PBS 등 지방 방송국도 참여했다. 이들은 “이번 예산 삭감은 도시 외 지역과 저소득층을 위한 지역 방송의 생존을 위협하는 조치”라고 지적했다.
공영방송의 존재 이유…“수익보다 공공성”
PBS는 상업성이 낮아 수익을 내기 어려운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과 지역 밀착형 보도, 다문화 프로그램 등을 중심으로 운영되어 왔다. 대표작인 ‘세서미 스트리트’와 ‘미스터 로저스’는 수십 년 동안 아이들에게 교육 콘텐츠를 제공해 왔다. 또한 NPR은 전국 1,000개 이상의 지역 라디오 네트워크를 통해 대형 미디어가 다루지 않는 뉴스와 이슈를 조명하며 정보 격차 해소에 기여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공공성 중심의 운영은 최근 정치적 압력과 재정 축소로 근본적인 위협을 받게 되었다.
스트리밍 시대, C-SPAN은 어디로…‘정보 민주주의’ 흔들려
공영방송 중 하나인 C-SPAN도 흔들리고 있다. C-SPAN은 케이블 및 위성 사업자가 의무적으로 소액 라이선스 비용을 지불하고 송출해왔지만, 최근 ‘코드 커팅’ 현상으로 가입자가 급감하면서 운영 기반이 무너지고 있다.
가구당 월 7.25센트라는 낮은 요금에도 불구하고, 유튜브TV와 훌루 등 스트리밍 사업자는 “수요가 없다”는 이유로 편성을 거부하고 있다. 이에 대해 공화당의 척 그래슬리와 민주당의 에이미 클로버샤 상원의원은 공동 결의안을 제출하며, 스트리밍 플랫폼도 C-SPAN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보의 평등한 접근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진보 미디어’라는 프레임…사실은 농촌과 저소득층이 핵심 시청자
보수 진영은 PBS와 NPR을 ‘진보 미디어’로 규정하지만, 실제 시청자 구성은 이 프레임과 다르다. PBS 자체 조사에 따르면 시청자의 2/3는 공화당 지지층이거나 무소속이며, 60% 이상은 농촌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또한 시청자의 절반 이상이 중·저소득층으로, 상업 미디어가 외면한 계층이 주요 시청층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공영방송은 단지 콘텐츠 제공자가 아니라, 정보 격차를 줄이는 공공 서비스 역할을 해왔다.
· PBS는 모든 미국인을 위한 방송입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미국 전역의 모든 지역 사회에 도달합니다.
· 미국 TV 가구의 58% (1억 3천만 명 이상)가 연간 동안 PBS 회원 방송국을 시청합니다.
· 우리 시청자의 60%는 농촌 지역에 거주합니다.
· 정치적 스펙트럼을 아우르는 미국인들이 PBS를 시청합니다. 우리 시청자의 약 2/3(63%)는 공화당원 또는 무소속으로 자신을 식별합니다.
유럽은 왜 공영방송에 투자하는가…BBC와 북유럽 모델
공영방송에 대한 정치적 시선은 국가마다 다르다. 유럽 주요 국가는 공영방송을 국가 전략의 일환으로 보고 지속적인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영국 BBC는 매년 40억 파운드(한화 약 7조 원)의 수신료를 바탕으로 ‘셜록(SHERLOCK)’, ‘플래닛 어스(PLANET EARTH)’ 등 전 세계적 흥행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다.
독일의 ZDF는 2024년 기준 평균 시청률 13%를 유지하며 민영 방송과 대등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으며, 북유럽 국가들(스웨덴, 노르웨이 등)은 1인당 연간 100달러 이상의 공영방송 예산을 배정해 공공 교육, 지역 뉴스, 문화 보급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한국 공영방송의 현실…EBS와 KBS에 드리운 그림자
한국 역시 공영방송의 위기를 피해가지 못하고 있다. KBS는 수신료 분리징수 논란, 정치 편향 논쟁에 더해 OTT 시대에 맞는 콘텐츠 전략 부재로 경쟁력을 잃고 있다.
EBS는 교육 취약계층을 위한 핵심 콘텐츠를 제공하는 방송사이지만, KBS 수신료의 3%(75원)만 지원 받는 문제와 시청자 이탈 등으로 본연의 역할이 약화되고 있다. 특히 AI 시대의 교육 격차 심화 속에서 EBS의 콘텐츠는 더욱 중요한 공공재로 평가받고 있지만, 현실은 제작비 부족과 인력 감축으로 이어지고 있다.
공영방송의 존재 조건…독립성과 지속 가능성 확보 필요
전문가들은 공영방송이 살아남기 위한 핵심 조건으로 다음 네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정치권으로부터 독립된 편성 구조를 갖춰야 한다. 둘째, 수신료 외에도 공공기금, 시민 기부, 기업 협찬 등을 통해 재원을 다변화해야 한다. 셋째, 유튜브·넷플릭스 등 디지털 플랫폼과의 연계 전략을 수립해 젊은 세대를 끌어들여야 한다. 넷째, 지역 사회 기반 프로그램을 확대해 지역 밀착형 저널리즘의 생태계를 회복해야 한다.
다음 회 예고: PBS 폐지 시나리오가 현실이 된다면…지역 뉴스와 어린이 교육 콘텐츠의 미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