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에 손 들어준 미 법원… 산업 발전에 힘 실려
연이은 판결로 ‘AI 학습의 공정이용(fair use)’ 인정… 하지만 '면죄부'는 아니다
미국 법원이 생성형 인공지능(AI) 학습을 위한 저작물 활용이 ‘공정이용(fair use)’에 해당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연이은 두 건의 판결에서 AI가 기존의 저작물을 학습하는 것이 ‘공정이용(fair use)’에 해당한다는 판단이 내려지면서 AI 산업에 유리한 방향으로 법적 해석의 물꼬가 트이고 있다. 하지만 이번 판결들이 AI 기업들에게 전면적인 ‘면죄부’를 준 것은 아니며, 향후 시장 피해에 대한 실증적 증거가 판결의 향방을 좌우할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두 판사… 같은 결론, 다른 논리
2025년 6월 23일,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지방법원의 윌리엄 앨섭(William Alsup) 판사는 앤트로픽(Anthropic)의 대형언어모델(LLM) ‘Claude’ 학습 과정에서 수백만 권의 디지털 책을 활용한 행위가 “극도로 변형적(exceedingly transformative)”이라며 공정이용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이어 6월 25일, 같은 법원의 빈스 차브리아(Vince Chhabria) 판사 역시 메타(Meta)의 ‘LLaMA’ 모델 학습을 위한 책 복제가 “고도로 변형적”이라고 인정하며, 저작권 침해가 아니라고 판결했다.
- 피고: Anthropic (AI 기업)
- 쟁점: Claude 모델 학습을 위해 수백만 권의 책을 구매·전자화하고, 700만 권 이상의 불법복제본을 다운로드한 것이 공정이용에 해당하는지 여부
2. 2. Kadrey 외 v. Meta Platforms, Inc. (2025. 6. 25. 선고, ‘메타 승소’)
- 피고: Meta (페이스북·인스타그램 모회사)
- 쟁점: LLaMA 모델 학습을 위해 토렌트로 수집한 책 데이터를 사용한 것이 공정이용인지 여부
두 판결 모두 “생성형 AI 학습이라는 목적은 기존 저작물의 원래 목적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판단한 점에서 일치한다. 예컨대, 소설은 독자가 ‘읽기’ 위한 것이지만, AI는 이를 학습 데이터로 삼아 전혀 다른 텍스트를 ‘생성’하는 용도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형성(transformative use)은 미국 저작권법 제107조에서 정한 공정이용 판단 기준 중 가장 핵심적인 요소다.
결정적 변수: 시장 피해 증거의 부재
그러나 두 판결은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법적 논리에는 차이가 있다. 앤트로픽의 Claude 소송 판결을 내린 앨섭 판사는 '변형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나머지 요인—저작물의 성격, 사용된 분량,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부차적이라고 봤다. 반면, 메타 AI 판결을 내린 차브리아 판사는 “시장 피해가 가장 중요한 요소”라며 해당 부분에서 원고 측이 증거를 충분히 제시하지 못한 점을 지적했다.
실제로 차브리아 판사는 “이번 판결은 메타의 AI 학습 행위가 합법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원고들이 적절한 논리를 펴지 못했고,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법원이 어쩔 수 없이 공정이용을 인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그는 “LLM이 수백만 개의 2차적 콘텐츠를 빠르게 생성해 시장을 희석(dilute)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래에는 시장 피해가 공정이용 판단을 뒤집는 핵심 논거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불법 복제본’ 보관은 예외… 일부 책임 인정
한편, 앨섭 판사는 앤트로픽이 ‘피라미드 라이브러리(pirate libraries)’에서 불법으로 다운로드한 수백만 권의 책을 장기 보관하려 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모든 공정이용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며 공정이용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훈련에 사용된 책이 아닌, 단순 보관을 위한 불법 복제는 AI 학습과 무관한 용도이며, 저작권자의 시장을 직접적으로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해당 사안은 향후 손해배상 소송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법원도 인정한 ‘전례 없는 기술’… 향후 대법원까지 갈 수도
이번 판결들은 단순히 AI 기업의 승리로 보기에는 복합적인 함의를 지닌다. 차브리아 판사는 “생성형 AI는 법원이 한 번도 다뤄본 적 없는, 전례 없는 기술”이라며 “동시에 매우 변형적이면서도 시장을 희석시킬 위험이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향후 공정이용 판단에 있어 기존 판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LLM의 특수성을 고려한 새로운 기준 정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두 판결이 내려진 이후 미국 법조계에서는 “이제 AI 저작권 소송은 제2막에 접어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초기에는 대부분의 사건이 기각 여부만을 판단하는 ‘소장 단계’에 머물렀다면, 현재는 증거가 제출되는 ‘요약 판결(summary judgment)’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향후 제3막은 항소심, 제4막은 대법원 판결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산업 보호와 창작자 권리 사이의 균형 필요
이번 미국 판결은 국내에서도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올 수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생성형 AI 학습을 위한 텍스트·이미지·음원 데이터의 저작권 문제가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지난 21대 국회에서는 AI 학습 목적의 저작물 이용을 허용하는 ‘공정이용 특례’ 법안이 준비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처럼 법원이 일정 부분 AI 기업의 손을 들어주더라도, 저작권자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규율은 필요하다는 점도 함께 확인됐다. 무엇보다도 생성형 AI가 실제로 저작물과 유사한 결과물을 생성하거나, 그로 인해 원저작자의 수익 기회를 침해하는 경우, 법원은 보다 엄격하게 판단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향후 국내 제도 설계에 있어, 산업 진흥과 저작권 보호 사이의 정교한 균형이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조심스러운 승리'… 다음 라운드는 증거 싸움
결국 이번 판결은 AI 기업들에게 일종의 '조심스러운 승리'다. 미국 연방법원은 AI 학습 목적의 저작물 활용을 공정이용으로 판단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원고의 준비 부족이라는 한계 속에서 내려진 판결이기도 하다. 향후 저작권자들이 실질적인 피해나 유사 산출물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다면, 반대의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 이번 판결의 또 다른 결론인 셈이다.
AI 기술이 가져올 법적 지형 변화는 이제 막 시작됐다. 지금은 누구도 최종 승자를 예단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기술의 혁신성과 창작자의 권리는 더 이상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조화롭게 설계되어야 할 동반자라는 점이다.